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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한 시간 쓰고 버린다고? 테니스공 운명 바꿀 수 없을까?

‘일회용 스포츠’가 된 테니스
Sep 15, 2025
고작 한 시간 쓰고 버린다고? 테니스공 운명 바꿀 수 없을까?

하얀 유니폼이 빛나는 윔블던, 뉴욕 US오픈의 야경, 붉은 클레이의 롤랑가로스, 그리고 태양처럼 푸른 호주오픈의 하드코트. 그랜드슬램은 매해 수백만 관중을 사로잡고, 수억 명의 TV 앞에 앉힌다. 이 스포츠는 ‘우아함’과 ‘품격’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 전 세계 테니스 인구는 약 1억 600만 명, 불과 5년 전보다 25.6% 늘어난 수치다. 숫자는 화려하고, 시장은 커졌다. 코트도, 라켓도, 그리고 테니스 공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늘어난 공의 소비를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잘 보이지 않는 문제 하나가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테니스공이 축구공이나 야구공처럼 닳고 닳을 때까지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프로 무대는 물론이고 동호인 경기에서도 테니스공은 사실상 ‘일회용품’이다. 경기 몇 세트만 지나도 탄력은 금세 죽는다. 테니스는 그만큼 공의 상태에 민감한, 까다로운 스포츠다.

한 시간짜리 생명

프로 무대의 공은 생각보다 수명이 짧다. 경기는 늘 여섯 개의 새 공으로 시작한다. 첫 일곱 게임 뒤에는 다시 여섯 개를 바꾸고, 그 뒤로는 아홉 게임마다 교체한다. 규정상 워밍업을 두 게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따져보면 대략 45분에서 1시간 남짓. 믿기 어렵지만, 테니스공의 평균 수명은 고작 한 시간도 채 안 된다. 그리고 이 짧은 수명은 곧 엄청난 소비로 이어진다.

숫자로 환산해보자. 여자 경기에서 두 세트를 스트레이트로 끝낸다고 치면, 예컨대 6-4, 6-4 같은 경기에서 이미 세 세트 분량의 공을 쓰게 되어 18개 안팎이 소모된다. 남자 경기에서 다섯 세트 접전이 벌어지면 30개, 많게는 36개 이상이 코트를 밟는다. 규모를 대회 단위로 넓히면 더 극적이다. US오픈은 2주 동안 10만 개, 윔블던은 5만 5천 개가 넘는 공을 소비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3억 3천만 개의 공이 새로 생산된다.

왜 이렇게까지 공을 갈아치워야 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공은 라켓과 코트에 맞으며 펠트가 부풀고 압력은 조금씩 빠져 바운스가 낮아진다. 그렇게 되면 랠리의 속도와 스핀, 경기 양상이 달라진다. 승부의 공정성을 위해 교체는 불가피하다. 선수 입장에서는 작은 차이가 곧 경기의 향방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규칙의 대가는 가볍지 않다. AP통신은 “테니스공은 매립지에서 400년이 지나야 분해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연간 전 세계에서 3억 3천만 개가 생산되지만, 재활용되는 것은 1%에 불과하다. 경기를 위한 짧은 수명이 끝난 뒤, 이 공들은 지구에 세기 단위의 상처를 남긴다.

결국 폐기되는 운명

테니스공의 수명이 이렇게 짧다 보니, 사람들은 의문을 갖는다. “그럼 다른 공은 없을까? 조금 더 오래가는 건 없나?”

실제로 테니스공은 모양은 비슷해 보여도 종류가 다양하다. 대회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우리가 경기 전 ‘딱’ 소리를 내며 여는 캔볼이다. 내부에 고압이 들어 있어 처음 꺼냈을 때 가장 톡톡 튀고 빠르지만, 금세 압력이 빠지면서 반발력이 줄어든다. 그래서 프로 대회는 브랜드와 타입을 세밀히 지정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재활용이 되는 것은 아니며, 결국 몇 번 쓰이다가 버려진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코트의 성질이나 연령대에 맞춰 세분화되었을 뿐, 폐기의 운명은 캔볼과 다르지 않다.

이에 비해 레슨이나 볼머신에서 주로 쓰이는 트레이너볼도 있다. 트레이너볼은 겉모습은 캔볼과 거의 같다. 실제로 치면 바운스도 그럴듯하게 느껴져서, 동호인 입장에서는 크게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캔볼은 내부에 압축된 공기가 가득 들어 있어서 처음에는 톡톡 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압력이 빠져 금세 힘을 잃는다. 반대로 트레이너볼은 애초에 안에 압축된 공기를 넣지 않는다. 캔볼이 탄산음료처럼 내부 압력 덕에 톡톡 튀다가 가스가 빠지면 금세 힘을 잃는 구조라면, 트레이너볼은 방식이 다르다. 두꺼운 고무 속에 스펀지 같은 미세 기포층을 심어 두어, 공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 기포들이 눌렸다가 다시 밀어내며 바운스를 만들어낸다. 소파 스펀지를 눌렀다가 손을 떼면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래서 내부 압력이 빠져나갈 걱정이 없으니 훨씬 오래 버틴다. 다만 반발력이 캔볼만큼 가볍고 날카롭지는 않아 정식 경기에서는 쓰이지 않고, 주로 레슨이나 볼머신 훈련용으로 활용된다.

결국 두 공 모두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트레이너볼은 보다 오래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선택지다. 그러나 오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애초에 이 공들은 왜 재활용 될 수 없는 것일까?

재활용 불가능한 디자인

테니스공은 겉보기에는 단순히 고무 위에 천을 씌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다. 안쪽에는 단단한 고무 공이 있고, 그 위를 양모와 나일론이 섞인 펠트로 덮은 뒤 강력한 접착제로 붙여 놓는다. 이 덕분에 공은 튼튼하고 잘 튀지만, 버려질 때가 문제다. 펠트와 고무가 단단히 붙어 있어 떼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활용보다는 매립이나 소각으로 직행한다. 사실상 ‘완벽하게 설계된, 불완전한’ 제품이다.

테니스 공의 포장재도 사정은 비슷하다. 새 공을 살 때 여는 원통형 플라스틱 통을 떠올려 보자. 압력을 유지하려고 두껍고 단단한 플라스틱을 쓰고, 여기에 알루미늄 뚜껑과 라벨까지 덧붙인다. 겉으로는 예쁘고 견고하지만, 여러 소재가 한데 섞여 있어서 재활용은 사실상 어렵다. 결국 그 통 역시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윔블던으로 가는 5만 마일의 여정

테니스공은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는 구조적 한계도 문제지만,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환경 발자국을 남긴다.

2017년 영국의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는 윔블던에서 쓰이는 테니스공의 여정을 추적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공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각각 11개국에서 따로 모인다. 완성되기까지 이동한 거리는 5만 마일, 약 8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지구 두 바퀴를 도는 거리다.

예를 들어보자. 공 안쪽의 고무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점토 성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반발력을 조절하는 모래 성분인 ‘실리카’는 그리스에서, 고무의 탄성을 높이는 ‘마그네슘 카보네이트’는 일본에서, 마모를 줄이는 ‘산화아연’은 태국에서, 그리고 고무를 굳게 결합시키는 ‘황’은 한국에서 공급된다. 핵심 원료인 천연고무는 말레이시아에서 베어낸다. 이렇게 모인 재료들이 필리핀 바탄(Bataan)에 있는 공장으로 집결해 최종적으로 공의 형태를 갖춘다. 연구를 진행한 존슨 박사는 당시 “5만 마일이 필요한 스포츠 제품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비판할 정도다.

결국 테니스공은 경기장에서 잠시 반짝이는 순간을 위해, 태어나기도 전에 지구에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치는 한 시간의 경기 뒤에는 이미 수천 킬로미터의 항로와 수백 년의 환경 비용이 겹겹이 얹혀 있다.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낭비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동호인 수준에서의 관습이다. 프로 경기의 공 교체 규칙이 문화처럼 확산되면서, 동호인 사회에는 “새 캔은 예의”라는 착각이 뿌리내렸다.

경기 전 인사와 함께 캔을 따는 풍경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흔하다. 많은 이들이 “시합 같은 감각”을 원하거나, 단순히 “그게 예의니까” 새 공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의례는 환경에 치명적인 비용을 남긴다. 프로 무대에서는 공정성을 위해 교체가 불가피하지만, 아마추어가 매번 새 캔을 까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에 가깝다.

한국의 현실은 더욱 극단적이다. 초심자조차 새 캔을 쓰는 것이 당연시되고, 2시간 내외의 게임에는 공값(4000~6000원)이 포함된다. 그리고 경기 직후 코트 옆에는 빈 캔과 거의 새것 같은 공이 쌓인다.

물론 반발력이 살아 있는 공에서 오는 만족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합리적 선택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초보 레슨자부터 부터 동호인 리그까지 무조건 새 캔을 사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불필요한 쓰레기만 늘어나고 있다.

해법은 있는가

테니스계도 더 이상 환경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애초에 새 공을 설계할 때부터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 또 하나는 이미 버려진 공을 다시 활용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흐름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주도한다. 윌슨은 트리니티(Triniti)라는 공을 선보였다. 기존처럼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플라스틱 캔에 담을 필요가 없다. 대신 FSC 인증을 받은 종이 포장으로 바꾸어 일회용 플라스틱 문제를 크게 줄였다. 또 공의 심지 부분을 ‘플라스토머’라는 새로운 합성 소재로 만들어 시간이 지나도 반발력이 더 오래 유지되도록 설계했다. 쉽게 말해 금세 죽는 공의 수명을 늘린 것이다. 이 제품은 국제테니스연맹(ITF)와 미국테니스협회(USTA)의 공식 인증까지 받아 정식 경기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 헤드(HEAD) 역시 포장재 개선에 집중했다. 재활용 플라스틱(r-PET)으로 만든 투명 캔을 도입해 라벨, 잉크, 부자재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재활용 가능성을 높였다.

두 번째 흐름은 재활용과 업사이클링이다. 네덜란드의 리뉴어볼(Renewaball)은 사용된 공을 직접 해체해 고무와 펠트를 분리하고, 30% 이상 재활용 소재를 섞어 새 공을 만든다. 환경영향평가(LCA) 결과 기존 공보다 탄소발자국을 29% 줄였다는 성과도 냈다. 미국의 리사이클볼즈(RecycleBalls)는 전국적인 수거 네트워크를 구축해 매년 수백만 개의 공을 회수하고, 이를 잘게 부숴 코트 표면재나 말 훈련용 바닥재로 재활용한다. 프랑스테니스연맹(FFT)의 ‘발르 존(Balle Jaune)’과 영국테니스협회(LTA)의 ‘다이유스(DYUCE)’ 프로그램도 같은 방식이다. 사용된 공을 체육관 바닥재로 만들어 장애 아동이나 지역사회 시설에 되돌려주고 있다.

이처럼 접근 방식은 달라도 메시지는 같다. 테니스공을 둘러싼 낭비와 환경 비용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분명 변화를 향한 시도는 이루어졌다.

다음 세대를 위한 랠리

테니스공은 한 시간 남짓 쓰이고, 지구에는 400년을 남긴다. 이 불균형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이제는 투어 프로 무대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다행히 국제테니스연맹(ITF)도 2022년부터 공 교체 주기를 조정하는 방안을 논의하며 첫걸음을 뗐다. 아마추어 대회 역시 뒤따라야 한다. 친환경 포장이나 재활용 가능한 공을 우선 사용하도록 규정한다면, 실제로 가장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더불어 중요한 건 동호인의 태도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시로 새 캔을 개봉하던 오래된 관습을, “지속 가능한 공이 기본”이라는 새로운 문화로 바꿔야 할 차례다.

테니스는 오래도록 ‘예의의 스포츠’라 불려왔다. 이제는 라켓 너머의 상대뿐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지구를 향해 예의를 보여줄 차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베이스라인 밖에서>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