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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의 새로운 패권, 사우디아라비아

테니스의 미래를 열까, 전통을 퇴색시킬까
Aug 25, 2025
테니스의 새로운 패권, 사우디아라비아

세계 테니스의 ‘간판’이 바뀌었다.

2024년 2월 28일 남자 프로투어 ATP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PIF(Public Investment Fund) 와 다년간 전략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공식 세계 랭킹 명칭이 ‘PIF ATP 랭킹’으로 바뀌었다. 시즌 마지막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Year-End ATP World No.1 presented by PIF’ 시상까지 맡게 됐다.

ATP 세계 랭킹 타이틀은 지난 10년간 에미레이트(Emirates)와 페퍼스톤(Pepperstone)을 거쳐, 2024년부터는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차지하게 됐다. 이 간판 교체가 가져올 변화는 단순한 로고 교체일까, 아니면 테니스의 미래를 바꿀 서막일까.

달라진 테니스 투어 풍경

여자 투어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WTA 파이널스는 2024~2026년 사우디 수도 리야드로 옮겨가며 사상 최대 상금을 내걸었다. 2024년 총상금은 1,525만 달러, 2025년에는 1,550만 달러(한화 약 214억 원)로 2019년 중국 선전의 1,400만 기록을 넘어섰다. 여자 테니스 역시 중동 시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신호다.

남자 투어의 변화는 더 노골적이다. 2024년 리야드 시즌의 식스 킹스 슬램(Six Kings Slam)’ 초청전은 랭킹 포인트가 없어도 조코비치·나달·알카라스·시너 등 톱 스타들을 불러 모았다. 같은해 라파엘 나달은 사우디 테니스연맹의 홍보대사로 전격 합류했고, 라파 나달 아카데미를 사우디에 열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남녀 투어를 가리지 않고, 테니스 전체가 사우디의 행보에 발맞추고 있는 셈이다.

오일머니의 스포츠 전략

석유로 굴러가는 나라가 왜 스포츠에 이토록 집착할까.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를 보면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소프트 파워다. 소프트 파워란 국가의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와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힘을 말한다. 사우디가 세계적인 스타와 대회를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나라의 정치나 인권 문제가 여전히 논란이더라도, TV 화면에 비친 스포츠 스타와 화려한 경기장 모습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순식간에 덮어버린다.

다른 하나는 경제 다각화다. 석유가 언제까지나 사우디 경제를 떠받쳐주지는 못한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전략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국가 청사진으로 ‘비전 2030’ 을 내세우면서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관광·문화·스포츠 같은 새로운 산업을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그중 스포츠는 국민 건강과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까지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가장 눈에 띄는 무대다.

이 전략은 이미 숫자로 드러난다. 2023년, 국부펀드 PIF는 사우디의 4대 축구 클럽 지분 75%를 인수하고 여름 이적시장에만 약 9억5700만 달러(약 12조 원)를 퍼부었다. 제다에서 열리는 F1 사우디 그랑프리는 모터스포츠 허브 전략의 상징이 됐고, PIF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비 게임즈 그룹(Savvy Games Group)은 무려 378억 달러(약 500조 원)를 e스포츠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골프에서는 LIV 투어를 출범시키며 PGA와 힘겨루기를 벌였고, 2034년 FIFA 월드컵 개최권까지 따냈다. 종목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궤적 위에 있다. 테니스 역시 뒤늦게 사우디의 거대한 스포츠 투자 로드맵에 편입된 모습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과연 ‘오일머니’의 확장은 테니스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인가.

오일머니가 여는 기회

중동 자본이 테니스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상금 폭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금 인상은 보통 상위권 소수의 스타들에게 집중된다. 정작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미래를 향한 투자다. 의외로 사우디 자본이 이 부분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차세대 선수 육성이다. 사우디는 ATP에서 20세 이하의 유망주 선수를 뽑는 넥스트젠 파이널스(Next Gen ATP Finals)를 2023년부터 사우디 도시인 제다(Jeddah)로 가져왔다. 총상금은 2024년 기준 205만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런 경험은 지역 청년들이 언젠가 라켓을 잡으려는 꿈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즉 스타 선수를 사 오는 ‘단기적 쇼핑’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키우는 ‘장기적 투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하나는 기술 혁신이다. 2023년에 첫선을 보인 ‘ATP 테니스 IQ’는 2025년 사우디 국부펀드(PIF)의 후원을 받아 대폭 업그레이드됐다. 이 플랫폼은 스카우팅, 비디오 분석, 웨어러블 데이터를 한데 모아 선수들이 자신의 경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제는 ATP와 챌린저 투어 단식 선수 약 2,000명이 모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세계 톱10 같은 극소수만 전담 분석가를 고용해 누리던 혜택이, 투어 전 계층으로 확장된 것이다. ATP의 로스 허친스 스포츠 디렉터는 “고급 데이터가 더 많은 선수들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커리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화려함 뒤의 불편한 진실

화려한 무대 뒤에는 불편한 진실도 숨어있다.

먼저 ‘스포츠워싱(sportswashing)’ 논란이다. 스포츠워싱이란 인권 문제나 정치적 결함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국가가,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이미지를 세탁하는 전략을 말한다. 사우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우디는 여성 권리 제한, 표현의 자유 억압, 언론인 암살 사건 등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온 대표적인 국가다. 특히 2022년 제정된 개인지위법은 여성이 결혼할 때 아버지나 형제 등 남성 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법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담고 있다. 이는 21세기 글로벌 스포츠 무대에서 강조되는 성평등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런 이유로 휴먼라이츠워치(HRW)는 WTA 파이널스 리야드 개최를 두고 “사우디는 이 대회를 치를 자격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강력한 스폰서십과 상금 인상 뒤에는, 선수와 브랜드가 의도치 않게 사우디 정권의 이미지 세탁에 동원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캘린더 파편화 우려도 크다. 사우디의 초호화 초청전은 랭킹 포인트가 없어도 거액의 보장금과 화제성으로 톱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가 늘어나면 정규 투어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선수들은 체력 소모와 스케줄 과부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팬 경험 확대라는 명분 뒤에, 오히려 투어 자체의 가치가 희석되는 역효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불안은 자본과 거버넌스가 충돌할 때 생기는 정치적 불확실성이다. 골프에서 벌어진 일이 그 전형적 사례다. 사우디 자본이 만든 LIV 투어는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스타 선수들을 끌어갔고, 결국 PGA 투어와 정면 충돌했다. 테니스가 당장 두 개의 리그로 쪼개질 가능성은 낮지만, 위험이 없는 건 아니다. 이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테니스 조직에 외부 자본이 개입하면, 캘린더나 상금 체계 같은 핵심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선수들조차 “어느 대회를 뛰어야 하는가”라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테니스가 선택할 길

테니스는 이미 길을 정했다. 새로운 리그를 만들어 분열되기보다, 정규 투어 안에서 자본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PIF와의 파트너십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선수 커리어의 기준은 여전히 랭킹 포인트와 그랜드슬램 성적이고, 당분간은 아무리 거액의 초청전이 열려도 본게임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테니스의 미래는 “자본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결국 테니스가 맞닥뜨린 더 근본적인 과제는 자본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팬들의 신뢰와 종목의 정체성이다. 화려한 상금과 대형 이벤트는 당장은 흥행을 보장하지만, 팬들이 이를 “스포츠워싱 쇼”로만 본다면 오히려 이미지 타격은 선수와 투어 전체에 돌아온다.

새로운 자본은 테니스를 키울 수도 있지만, 그 우아함과 품격을 포장지로 삼을 수도 있다. 오일머니를 어떻게 다루느냐, 그 선택이 테니스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Source: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lwxg95wr9po

https://www.yna.co.kr/view/AKR20230629072300007

https://www.atptour.com/en/news/atp-pif-strategic-partnership-february-2024

https://www.wtatennis.com/news/3952623/riyadh-selected-as-the-host-of-wta-finals-from-2024-2026

https://www.vision2030.gov.sa/en/overview/pillars/an-ambitious-nation

https://www.reuters.com/world/middle-east/saudi-wealth-funds-savvy-games-group-invest-378-billion-2022-09-29/

https://www.reuters.com/sports/saudi-arabia-revives-sports-clubs-privatisation-plan-2023-06-05/

https://www.formula1.com/en/latest/article/need-to-know-the-most-important-facts-stats-and-trivia-ahead-of-the-2025-saudi-arabian-grand-prix.6A0OrkHOtZDMRyFg16hMbY

https://www.elibrary.imf.org/downloadpdf/view/journals/002/2022/275/article-A001-en.pdf

https://www.nocutnews.co.kr/news/5956413

https://www.nextgenatpfinals.com/en/news/next-gen-atp-finals-presented-by-pif-2024-prize-money

https://www.pif.gov.sa/en/news-and-insights/press-releases/2025/atp-and-pif-announce-atp-tennis-iq-powered-by-pif/

https://www.hrw.org/news/2024/04/10/saudi-arabia-hasnt-earned-womens-tennis-championshipshttps://edition.cnn.com/2023/06/06/golf/pga-tour-liv-golf-merger-spt-intl

https://www.forbes.com/sites/adamzagoria/2024/01/16/rafael-nadal-becomes-ambassador-for-saudi-tennis-amid-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