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그리고 이제 품위를 곁들인…
허물어지는 ‘품위’
테니스는 오랫동안 '품위(또는 품격) 있는 스포츠'의 대명사였다.
19세기 영국 귀족의 사교 문화에서 태어난 이 스포츠는 전통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다. '포인트 중 소음 금지, 더블 폴트에 박수 금지' 같은 암묵의 금지조항이 쌓여 '조용한 테니스'가 관성으로 굳었다. 흥미로운 건, 침묵이 엄격한 규정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현대 윔블던도 '절대적 침묵'을 강제하지 않는다. 침묵은 관중 문화였의 일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 사례들을 보자.
2024년 롤랑가로스는 관중석 음주를 금지했다. 호주오픈은 과거의 '해피 슬램' 대신 '앵그리 슬램'이라고 불릴 정도다. 관중이 경기 도중 소리를 지르거나, 특정 선수를 향해 야유를 보내는 무례한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노박 조코비치 vs 카를로스 알카라스)에는 샴페인 코르크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US오픈 코트 17번엔 '해시 코트(Hash Court)'라는 별명이 생겼다. 뉴욕주 대마 합법화 이후 인근 코로나 파크에서 흘러들어오는 냄새 탓이다. 코트 위도 다르지 않다. 부서진 라켓은 쌓여만 가고, 심판에게 고함이 오가며, 선수 벌금 합계는 해마다 갱신된다.
‘품위의 테니스’ 시대는 이제 끝났을까.
우리가 품위라고 불러온 것이 실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침묵과 절제'라는 외형적 품위고, 다른 하나는 '규칙이 공정하고 일관되게 작동한다는 신뢰'라는 본질적 품위다. 전자는 앞서 언급했듯 많이 무너진 듯 보인다. 문제는 후자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은 원래 이랬다
US오픈이 열리는 빌리 진 킹 테니스센터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당황한다. AP통신은 이 대회를 "가장 시끄러운 그랜드슬램"이라 부른다. 비행기, 기차, 체인지오버마다 울려 퍼지는 음악. 윔블던 센터 코트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Don Omar의 "Danza Kuduro"가 스피커에서 쾅쾅 터진다. 2022년 준결승에 올랐던 프랜시스 티아포는 그해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관중의 70%는 이미 취해 있고, 완전히 만취 상태예요. 아무리 '조용히 해달라(hush)'고 말해봐야 소용없죠. ("Seventy percent of the fans are just loaded and just absolutely drunk. You can tell them 'hush' as you want." )(TIME, 2023. 8. 29)
같은 해 4강까지 오른 프랑스의 카롤린 가르시아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확실히 더 시끄러워요. 아무래도 여기 경기장들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사람들이 농구나 야구, 미식축구처럼 마음껏 대화하고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스포츠 관람 방식에 익숙해서 그런 것 같아요. 테니스를 둘러싼 문화 자체가 다른 거죠.” ("Oh, they're noisier, for sure. Maybe it's because the stadiums are huge here and people are used to going to watch sports like basketball, baseball or American football, where they can chat or shout. The culture around it is different.") (AP, 2023. 8. 30)
1975년. US오픈이 그랜드슬램 최초로 야간 경기를 도입하면서 '뉴욕식 에너지'는 대회 브랜드가 됐다. 1990년대 지미 코너스의 전설적인 플레이는 '소란함’을 강화했고, 관중의 열기는 경기 서사의 일부가 됐다. 2016년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 개폐식 지붕이 생기면서 소리는 더 커졌다. 23,771석 규모의 돔 안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조코비치마저 "우리 스포츠에서 가장 크고 가장 시끄러운 스타디움"이라 인정하게 만들었다. 2023년 US 오픈이 경기장의 PA(Public Address, 장내 방송/확성) 시스템을 전면 교체했다는 것은, 테니스장을 단순히 경기 진행 상황을 알리는 공간이 아니라 '클럽이나 콘서트장처럼 소리로 압도하는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회의 음료도 살펴보자. 시그니처 칵테일 '허니 듀스'는 2024년에만 55만 7천 잔이 팔렸다. 잔당 23달러, 약 1,280만 달러의 매출이다. (Washington Post, 2025. 8. 29) 2025년엔 39달러짜리 '워터멜론 슬라이스'까지 추가됐다. US오픈이 파는 건 이제 좌석만이 아니다.
2023년에는 기후 시위대가 코트에 난입해 경기를 49분이나 멈추게 했고, 즈베레프의 경기에서는 나치 구호를 외친 관중이 퇴장당하기도 했다. (ESPN, 2023. 9. 5 / 9. 7)
다른 대회들도 흔들린다
US오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그랜드 슬램 역시 하나씩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롤랑가로스는 2024년 관중석 주류 반입을 전면 금지했다. 한 관중이 데이비드 고팽에게 풍선껌을 뱉었고, 이가 시비옹테크는 포인트 중 관중 소음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이에 대회 주최측은 스탠드 내 음주를 전면 금지하고 위반 시 즉시 퇴장 방침을 세웠다(Guardian/Reuters, 2024. 5. 30). 이 조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호주오픈에서는 2025년, 맥주 구역(Peroni 바)에서 관객이 의자를 투척하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해당 영상이 확산됐다. 또 파티 분위기로 소란이 커지자 8번 코트에서 열리던 펠릭스 오제 알리아심(캐나다) vs 알레한드로 다비도비치 포키나(스페인)의 경기가 진행 도중 인접한 7번 코트로 이동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대회 측은 그러나 "퇴장 건수는 예년과 비슷하다"며 엔터테인먼트 확대 기조를 유지했다. (AP News / Sports Business Journal, 2025. 1.)
윔블던에서는 코르크가 날아들었다. 윔블던은 전통적으로 관중들이 딸기와 크림, 그리고 샴페인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필 가장 정숙해야 할 서브 직전에 코르크가 날아든 것이다. 2019년과 2023년에 이어 2025년에도 샴페인 코르크가 서브 직전 코트로 튀어들어 경기가 중단됐다. (Independent, 2025. 7. 9 / Fox Sports Australia). 2022년 결승에서는 닉 키리오스가 소음을 내는 관중을 지목하며 "700잔은 마신 것 같다"고 언급해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관중은 이제 어떤 날, 테니스장의 주인공이 된다.
코트 위도 다르지 않다
코트 위는 그럼 여전피 ‘품위’있게 운영되고 있는가?
선수가 라켓을 부수고 던지는 건 이제 흔한 장면이다. 루블레프는 2024년 롤랑가로스에서 라켓을 자신의 허벅지에 내리쳐 피를 흘렸다. 메드베데프는 2025년 호주오픈에서 카메라와 라켓 파손 등으로 총 7만 6천 달러 벌금을 받았고 (AP News / ESPN, 2025. 1.), 그해 여름 US오픈에서는 관중 선동과 라켓 남용으로 4만 2,500달러가 추가됐다. (Reuters, 2025. 8. 28) 2024년 상하이 마스터스에서 티아포는 심판에게 폭언을 퍼부어 총 12만 달러 제재를 받았고 (ESPN, 2024), 위고 가스통은 고의로 공을 던져 포인트를 무효화하려 한 행위로 14만 4천 유로까지 부과됐다가 조건부 감경됐다. (Defector, 2024)
2025년 윔블던 대회 초반에만 선수 벌금 총액이 약 25만 달러(한화 약 3억 4천만 원)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폭증한 데 이어, 2026년 호주오픈에는 특히 다니엘 메드베데프가 심판 항의와 관중 마찰로 단일 대회 역대급 액수인 76,000달러의 벌금을 부과받는 등, 2025년 ATP가 그랜드슬램 중대 위반 시 상한액을 25만 달러까지 대폭 인상한 이후 고액의 실효적 집행이 상시화되는 추세이다. 이는 욕설이나 라켓 남용에 대해 예외 없는 ‘무관용 원칙’과 동일 연도 반복 위반 시 100% 가중치를 적용하는 정교해진 징벌적 시스템이 현장에 본격 도입된 결과로 분석된다.
심판이라는 변수
관중은 매너를 잊고 선수는 이성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경기장을 조율해야 할 심판마저 현장의 맥락을 무시한 기계적 판정에 매달리며 테니스의 품격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2026년 투어에서 꽤나 뜨거운 감자는 심판의 재량에 관한 것이다.
가령 서브클락의 예시를 보자. 포인트가 끝나면 3초 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25초 안에 서브를 넣어야 한다. 2018년 도입됐고 2024년부터 심판 재량 없이 자동 개시로 바뀌었다. 하지만 2026년 2월 도하오픈, 알카라스가 타임바이얼레이션을 받은 뒤 기자회견에서 작정한 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시간 규정은 정말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요. 엄청난 랠리 끝에 네트 앞에서 포인트를 마무리하고, 수건을 집으러 전력 질주하고 나면 저에게 남은 시간은 사실상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관중들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지연의 원인이 됩니다. 시간이 3~4초 남았을 때 시계를 봤지만 도저히 서브를 넣을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심판은 저에게 경고를 줬죠. 개인적으로는 좀 더 관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규정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이런 치열한 경기에서는 항상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저에게는 이런 상황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로 느껴집니다. (“Honestly, I think the time rule is absurd. After a very demanding point, finishing at the net, sprinting to my towel, I practically had no time left. Besides, the crowd was still shouting and cheering, which also causes delays. I looked at the clock when there were three or four seconds left and I didn't have enough time to serve, but she still gave me a warning. Personally, I think there should be a bit more leniency, even a reconsideration of the rule, because in such tough matches, the same thing always happens, and to me, it's ridiculous.") (Tennis365, 2026. 2. 20)
인디언웰스에서 메드베데프가 가세했다.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서브클락(샷 클락)이라는 게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이죠. 저는 심판의 배려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서브를 아주 빨리 넣는 선수조차, 40번의 랠리를 주고받고 코너 구석에서 포인트가 끝나는 상황이 생기면 시간 압박을 받거든요. 오늘 몇 번이나 그랬는데, 서브를 넣으러 가면서 수건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저 숨을 좀 고르려고 했을 뿐인데 시계를 보니 딱 5초 남았더라고요.” (It's a very tough question, because the shot clock is so subjective. I do think there should be some consideration from the referee, meaning even me who goes super fast on my serve, if you play a 40-shot rally and maybe you finish in the corner, today happened a couple of times, I go to serve and I feel like I didn't even ask for the towel, I was just trying to get some breath, and I look, it's like five seconds.") (Tennis.com / The Tennis Gazette, 2026. 3. 12)
서브클락의 아이러니는 다른 곳에서도 드러났다. 2023년 US 오픈에서 사바렌카가 서브 준비를 마치고 상대를 기다리는데 상대 지글문트가 등을 돌리고 코트 뒤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페이스를 늦춘 건 지글문트였지만 타임바이올레이션 압박을 받는 건 서브를 넣어야 하는 사바렌카였다.
서브클락의 자동화는 심판에게서 '재량'이라는 권한을 뺏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책임 회피의 면죄부를 준 셈이다. 2024년부터 도입된 3초 자동 개시 규정은 심판을 판정관이 아닌 '타이머 감시원'으로 격하시켰고, 심판들은 시스템의 공정성 뒤에 숨어 현장의 맥락을 읽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 규칙은 경기를 원활하게 돕기 위해 존재하지만, 심판이 상황의 맥락을 무시하고 시계의 숫자만 추종할 때 규칙은 도리어 선수를 옭아매게 된다. 위 사례들은 스포츠의 상식과 품격에 대한 문제다.
테니스, 그리고 이제 품위를 곁들인…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테니스의 품위는 끝났는가.
관중이 시끄러워졌다고 품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US오픈의 소란과 야간의 함성이 그 대회의 정체성이라면, 그건 다른 종류의 품위다. 문화는 변한다. 침묵만이 품위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선수들이 라켓을 부수고 고함을 친다고 품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극한의 압박 상황에서 감정이 터지는 건 어느 정도 피하기 어렵다. '위험이면 실격, 아니면 벌금'이라는 현행 시스템은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선을 긋는 현실적 해법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규칙이 예측 가능하게 작동한다는 믿음. 이것이 흔들릴 때 품위는 진짜로 무너진다. 같은 25초가 어떤 심판 앞에선 엄격하게, 어떤 심판 앞에선 느슨하게 흐른다면 선수들은 규정과 싸우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라켓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심판석 앞에서 고함으로 하게 된다.
롤랑가로스의 금주 조치가 의미 있는 건 술을 금지해서가 아니라 명료하기 때문이다. 위반하면 퇴장. 모두가 알고, 모두에게 같이 적용된다. 그것이 품위의 조건이다. 침묵만이 정답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경기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즉, 테니스는 예전의 품위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스포츠가 될 수 있다.